주일 성서정과 묵상 (2023년 12월 17일/대림절 세 번째 주일)

 

성서정과 복음서: 요한복음 1장 6-8, 19-28절

진짜 간증이 필요한 때
요즘 소년시대라는 드라마가 한국에서 인기 있다고 합니다. 1980년대 충청남도 온양과 부여를 배경으로 한 고등학생들의 이야기인데요,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들이 쓰는 충청도 사투리입니다. 젊은 연기자들이 구수하고 맛깔나게 쓰는 사투리가 너무 웃기고 재밌어서 대사를 따라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드라마의 중반까지는 재밌는 사투리와 함께 코믹한 요소가 많이 등장해서 시청자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드라마를 봤는데, 중반이 지나며 드라마 보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왜냐면 극의 소재로 학교 폭력과 일진 문화가 나오는데, 이런 것들이 극 초반에는 조금은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다 중반이 지나며 굉장히 진지하고 현실적으로 그려진 것이죠. 상황 설정이나 묘사가 너무 현실적이다 못해 잔혹하기도 합니다. 많은 시청자가 등장하는 인물들에 몰입하게 되어 자신도 힘들어하고, 특히 어린 시절 학교 폭력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경우 마치 자기 이야기 같아서 힘들어 하고 견디기 힘들어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그것이 드라마이지만 마치 내가 그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몰입하게 되어서 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저는 일단 드라마를 통해 사회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힘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소위 일진 문화에 대해,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의 폭력의 잔혹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간 다른 관점에서 너무 몰입이 되어서 보기 힘들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대본과 연기가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보면서 전혀 감정이입이 되지 않고, 딴 세상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극본이건, 연출이건, 연기 건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제가 목사이다 보니 ‘감정 이입’ 또는 ‘몰입’이라는 토픽에 대해 생각하며 성서의 이야기를 소비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성서를 읽으며 그 이야기가 나와는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리는지, 아니면 몰입이 되고 이입이 되며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지 생각해 보았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다양한 문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텍스트인데요, 요한복음의 독특한 스타일 중 하나는 많은 내용이 인물들 사이의 대화라는 방식으로 전달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속 예수님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이렇게 대화의 형태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유는 뭘까? 저는 요한복음 말씀이 그 대화의 현장으로 우리를 이끌고 초대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를 보며 주인공들의 대사나 그들이 겪는 고난 또는 사랑에 몰입되어 같이 힘겨워 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우리를 예수님과 대화하는 그 현장으로 초대한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은 어떤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성서정과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6절에서 8절은 요한이라는 인물에 대해 소개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이라고 말하죠.
두 번째 단락인 19절에서 28절은 긴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대화인데요, 대화의 주제 역시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의 핵심은 “Who are you?”입니다. 요한이 누구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 번 질문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요한도 세 번 답합니다. 첫 번째 답변은 “I am not”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은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아니며,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부정의 답변을 하죠. 두 번째 답변은 “I am” 또는 “What I do”로 시작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 즉 소명에 대해 말합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하죠. 세 번째로 그는 I do this의 대답을 합니다. 그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외치고, 회개의 세례를 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든지 깊이 있게 본문을 분석하고 다양한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위 신학적인 작업을 할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이번 주에 말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신학적인 해석 작업이 아니라 대화의 주체로서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대답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빛이신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인 성도요 제자라고 스스로를 부른다면, 우리는 나의 말로 대답해야 합니다. “I am not”으로 시작하는 대답은 나의 한계를 직시하는 것이겠죠. “What I do” 또는 “I am”으로 시작하는 대답은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충분히 성찰하는 것이겠죠. “I do this”로 시작하는 대답은 그 소명을 위해 내가 실천할 것들을 명확히 아는 것이겠죠.
본문은 반복해서 세례자 요한을 증인이라고 말하는데요, 증인이 하는 증언은 사실에 대한 솔직하고 진실한 1인칭 진술입니다. 영어로는 이 1인칭 진술을 testimony라고 합니다. 증언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우리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간증이라는 말로도 쓰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 요한에 대한 오늘 본문은 우리 스스로의 증언 즉, 간증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교회는 무엇인가요? 오늘만큼은 이해와 해석과 연구가 아닌 간증, 1인칭으로 말하는 진짜 간증이 우리 삶을 통해 고백 되고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