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성서정과 묵상 (2023년 12월 31일/성탄 후 첫 번째 주일)

 

성서정과 복음서: 누가복음 2장 22-40절

<성육신: 관념과 추상이 아닌 땅과 땀의 진리>

 

시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의 일부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작가 정재찬은 그의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처음에 윤동주에게 별은 멋과 여운이 있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이었습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  조금 전 이야기드렸던 저의 모습과 같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되뇌며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별 하나에 어머니를 떠올리고 어머니를 부른 순간부터 별에 대한 연상이 추상에서 구체로, 관념에서 육체로 이행해 가면서, 시인은 그리움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들이 시인에게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죠.

 

저는 이 시와 이 해석을 읽으며 세상에 오신 별, 성육신한 별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야기하듯, 성탄절에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시작된 예수님의 삶은 철저한 육체의 삶으로 바뀌죠.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런 예수의 살을 또박또박 보여줍니다.

 

오늘 성서정과 복음서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의 가족이 성전에 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22절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죠. “모세의 법대로 그들이 정결하게 되는 날이 차서, 그들은 아기를 주님께 드리려고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산모가 출산을 한 이후 일정 기간 동안은 부정하기 때문에 성전에 가지 못하다 기한이 차면 정결 예식을 치르러 성전에 가는데요, 마리아도 이 정결 예식의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갑니다. 그리고 집안에 첫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바치는 예식을 치르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가족이 모두 함께 성전에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2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의 율법에 이르신 바 “산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한다 한 대로,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보통 비둘기 한 마리와 양 한 마리를 정결 제사 예물로 드려야 했는데요, 가난한 사람들은 양 대신 비둘기 두 마리를 대신 드리기도 했습니다. 말씀으로 보아 요셉과 마리아는 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드렸던 것 같습니다. 이 가정이 가난했다는 것을 말하는 거죠. 가난 또한 인간 예수의 현실이었습니다. 사실 요셉과 마리아뿐이었을까요? 당시 대부분의 서민들은 가난했습니다. 이 역시 철저히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뒤 이어 시므온과 안나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은 경건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시므온에게 죽기 전 메시아의 탄생을 볼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합니다. 일평생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던 이들은 드디어 메시아를 보게 됩니다. 기다리던 예수님은 만난 시므온은 메시아를 높이는 찬송합니다.

 

그런데 영광의 찬송 직후에 그는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실패와 회복의 표시이며 오해와 반대를 받을 인물, 당신의 마음을 칼로 찌를 고통입니다. 영광스러운 아기의 탄생을 노래하자마자 마치 험난한 예수의 삶을 아는 것처럼, 그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게다가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본 듯 이 아기는 마리아의 마음을 칼로 찌를 고통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영광과 거부, 기쁨과 고통, 탄생과 죽음, 영광과 수치 등 삶의 양면을 이야기하는 거죠.

 

하나님의 아들이고 신이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 갔던 말 그대로 난민의 삶을 살았었고, 정결 제물로 양과 비둘기가 아니라 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했던 가난한 현실이었고, 왕과 유력자가 아니라 힘없고 이름 없는 노인이었던 시므온, 그리고 평생을 과부로 살았던 안나에게 인정받는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시므온의 예언처럼 그는 오해와 반대를 받을 운명입니다.

 

저는 누가복음의 저자는 수많은 초기 신앙인들과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며 성육신의 신비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삶에 대해 권면했다고 생각합니다. 성육신이란, 그리고 제자의 삶이란 결코 우리 삶과 동떨어진 낭만적인 천상의 파티가 아니라는 것을요. 제자로 살아갈 때 실패와 회복을 경험하며, 고통과 거부도 경험할 것이라는 것을,

 

간혹 우리는 신앙을 우리 일상과 동떨어진 다른 이야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앙과 삶, 교회에서의 말과 행동과 일상의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말하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르는 우리 성도들의 삶과 신앙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보기 좋고 듣기 좋고 인조이 할 수 있는 럭셔리한 레저 같은 종교 활동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땅에서의 삶을 통해, 우리가 흘리는 땀과 우리가 쏟는 시간 속에, 누군가와 부대끼는 그 현실의 삶을 통해 또박또박, 하나하나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육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실천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2023년의 마지막 주이며 동시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성탄 후 첫 번째 주입니다. 하늘에 계신 신, 관념 속에 있던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 곁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를 따라 우리가 믿는 바를 또박또박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내려놓고 나의 것을 희생하며 다른 이에게 생명을 주는 그래서 어느 때는 고민되고 어려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